연안차씨문절공 지제종친회

후손들은 조상님의 음덕에 자긍심을 갖고 오늘을 영유하고 있습니다.

연안차씨의 연원

연안차씨(延安車氏)의 연원(淵源)

연안차씨(延安車氏)의 원조(元祖)는 중국황제(中國黃帝)인 헌원(軒轅)의 후손인 공갑(孔甲)의 동생 신갑(辛甲)께서 고조선(古朝鮮)으로 망명하여 평양(平壤)의 일토산하(一土山下)에 살면서 성(姓)을 왕씨(王氏)로 정하고 조명(祖明)이라 이름하고 단군조(檀君朝)에 치민장(治民長)을 하시였다.

그 후손인 왕수긍(王受兢)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원년기묘(元年己卯)에 기자(箕子)가 동쪽 땅에 와서 팔조교(八條敎)를 만들고자 하나 풍토가 달라 국내에서 현존자(賢尊者)를 얻고자 하니 백성들이 왕수긍(王受兢)을 천거하였다. 기자(箕子)는 공(公)을 교민사사(敎民士師)로 명하게 되였고 공은 팔조교(八條敎)를 만들어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니 기자(箕子)가 기뻐하였다. 공의 후손 왕몽(王蒙)은「일토초가자위왕(一土草家子爲王)」이란 비어(飛語)로 기준(箕準)의 박해를 당하니 이 수난을 피하여 일곱째 아들 왕림(王琳)을 대리고 지리산에 둔적하여 십여년을 피신하게 되였다. 어느 날 신이 나타나「너의 성인 왕자(王字)를 삼변(三變)하여 성을 정하면 자손이 난을 피하고 대창(大昌)하리라」하니 공은 왕자(王字)를 전자(田字)로 다시 신자(申字)로 다시 차자(車字)로 하여 차씨(車氏)로 성을 정하고 무(無)에서 다시 시작 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무일(無一)로 하고 아들 왕림(王琳)은 신(神)이 예시(豫示)한 두 번째라 신을(神乙)로 이름하고 지리산을 떠나 계림(鷄林 : 지금慶州)에 이거 하였다.

신라태조 혁거세(赫居世)는 계림에 도읍을 정할때 공은 신라태조를 섬겨 공훈을 세웠으며 태조께서 시중(侍中)으로 제수하고 차씨성(車氏姓)을 사성(賜姓)하니 차씨득성(車氏得姓) 시조일세(始祖一世)가 되었다.

득성시조 17세손 차제능(車濟能)은 미추왕조(味鄒王朝)에 승상(丞相)이요, 공의 16세손 차건갑(車建甲)은 소성왕조(昭聖王朝)의 원로승상(元老丞相)이다. 소성왕이 서거시(逝去時)에 친히 공에게 어린 태자를 보살펴 줄것을 부탁을 하였다.

그 후 태자가 12세에 즉위하시니 이분이 애장왕(哀莊王)이시다. 공은 왕의 보상(輔相)이 되여 왕을 보필하시고 나라에 대훈을 세우고 별세 하시니 왕이 만조백관에 하명하여 왕례(王禮)로 기장현(機張縣) 만화동(萬化洞)에 예장하고 공의 위패를 소성왕묘(昭聖王廟)에 배향하시니 공의 묘소를 차능(車陵)이라 칭하게 된 것이며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은 차능이 있는 곳이라 기장현(機張縣)을 차성(車城)으로 개칭하니 이것이 기장현(機張縣)의 고호(古號)이다.

승상(丞相) 차건갑(車建甲)의 아들 차승색(車承穡)은 신라 애장왕(哀莊王) 10년 기축(己丑)에 좌상(左相)이 되여 선고의 유언에 따라 왕을 보필 하였으나 왕숙인 김언승(金彦昇)이 왕을 시해하고 자립 즉위하여 헌덕왕(憲德王)이라 칭하니 좌상(左相) 차승색(車承穡)은 아들 사공(司空) 차공숙(車恭叔)과 더불어 임금의 원수를 갚으려고 헌덕왕(憲德王)이 사냥 나감을 틈타서 다리 밑에 숨어서 시해 하고자 하였는데 이 비밀을 아는 자가 있어 언승(彦昇)에게 알려 언승이 병졸을 풀어 잡으려고 하니 공의 부자는 생질인 요동백(遼東伯) 김반전(金盤傳)의 아들 김생(金生)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에 헌덕왕(憲德王)은 차승색(車承穡)을 체포하기 위하여 금 천근(千斤)과 식읍(食邑) 만호(萬戶)를 현상으로 내걸고 찾으니 김생(金生)이 가난하여 현상을 탐하여 외숙을 밀고 하고자 하니 김생(金生)의 종이 이것을 알고 공에게 알리니 공의 부자는 밤을 타서 몸을 피하여 황해도(黃海道) 유주(儒州) 구월산(九月山) 묵방동(墨坊洞)에 은거하여 조모성인 양씨(楊氏)를 모칭(冒稱)하며 피신하였다.

그 후에 모칭한 양씨(楊氏)는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모성류씨(冒姓柳氏)로 하고 이름은 백(栢)으로 개명하고 아들 공숙(恭叔)은 숙(淑)으로 개명(改名)하여 유주(儒州)의 부두가(富荳家)에 고용살이를 하면서 피신을 하였다. 한편 차공숙(車恭叔)의 동생 신라조 사공(司空) 차공도(車恭道)는 강남으로 피신 구성왕씨(舊姓王氏)로 복성 하였는데 이분이 고려 왕건태조(王建太祖)의 증조요 고려국조 원덕대왕(元德大王)이시며 개성 왕씨의 시조이시다. (開城王氏族譜參照) 왕건태조(王建太祖) 정남(征南 : 後百濟征伐)하시니 본성차씨(本姓車氏)를 감추고 모성(冒姓)을 사용하는류해(柳海 : 사호(賜號) 차달(車達)은 삼한(三韓)의 호부(豪富)라 왕건태조를 도와 대훈을 세우니 고려태조는 차씨(車氏)의 묘예(苗裔)라 모성류씨(冒姓柳氏)를 사용한 류백(柳栢)으로 부터 류해(柳海)까지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토록 명하여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다시 환성(還姓)하여 성명(姓名)은 차해(車海)이며 왕건태조(王建太祖)로부터 받은 사호(賜號) 차달(車達)의 뜻은 「차씨(車氏)를 전(傳)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복성(復姓)을 뜻하는 것이다.

조선조에서 왕명으로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께서 찬술(撰述)한 운암선생(雲巖先生) 설원기(雪寃記)와 고려조 내사(內史) 서희(徐熙)가 찬집(撰集)한 가사(家史) 정지상(鄭知常)이 찬술(撰述)한 서경야사(西京野史) 김방경(金方慶)이 기술한 초당일기(草堂日記)등에 의하면 차달(車達)은 려실(麗室)에 장정(壯丁)을 나날이 보내어 주고 공의 큰아들 차효전(車孝全)은 왕사에 어려움을 당하여 흥원(興原) 땅에 백성을 속곡(粟穀)으로 진대(賑貸)하여 백성을 구휼(救恤)하고 현릉(顯陵 : 高麗始祖의 墓號)과 종사(宗社 : 宗廟社稷)를 정할 때 공훈을 세우고 려태조(麗太祖)가 남정(南征 : 後百濟征伐)을 할 때에 수례를 판출(辦出)하여 계량(繼粮)을 실어서 향궤(餉饋)로 운반하였다. 려태조(麗太祖)는 특별히 공의 아버지에게 차씨세적(車氏世績)을 이어라고 차달(車達)로 사호하고 특별히 차씨(車氏)로 하라 한것은 아들 차효전(車孝全)의 수공(首功)을 들내는 성(姓)으로 분부(分付)를 하였다. 개국공신(開國功臣)을 책록(策錄)하던 날에 차달(車達)에게 대승(大丞)을 제수하여 통합삼한(統合三韓) 벽상이등공신(碧上二等功臣)에 봉록하고 특명으로「念昔車氏之弘烈은 旣不可忘也요 這間柳氏之冒稱은 又不可廢也라」하였다. 이 말은 려태조는 차달(車達)에게 특별히 명하여 가로되「옛 차씨(車氏)를 생각하면 원래의 홍열(弘烈)을 가히 잊을 수 없고 그간 류씨(柳氏)로 거짓 불러온것을 또 폐함도 가하지 못함이라」하면서 큰아들 차효전(車孝全)은 차씨(車氏)로 조상의 홍열(弘烈)을 승계하라 하고 개국의 수공자로 신숭겸(申崇謙)과 복지겸(卜智謙)과 더불어 일등공신(一等功臣)에 배열하여 대광(大匡)의 벼슬을 제수하였고 백작(伯爵)을 봉하여 식읍천호(食邑千戶)를 염주(鹽州)로 하사하니 이곳이 차씨(車氏)의 종적지(宗籍地)로 되고 대광지백(大匡之伯)차효전(車孝全)은 비로소 득관조(得貫祖) 일세(一世)가 되었다. 그 후 려조 23대 고종왕(高宗王)이 거란병 방어에 공있는 곳이라 영응현(永膺縣)으로 승격하고 이 고을 사람 차송우(車松祐)가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됨으로 이곳에 지복주사(知復州事)로 승격되었고 려조 24대 원종왕(元宗王)이 또 이분희(李汾禧)가 위사공신이 되니 이곳을 석주(碩州)로 고치고 또 고려조 25대 충열왕(忠烈王)이 즉위(卽位)하여 현명(縣名)을 승격(陞格)하여 온주목(溫州牧)으로 한 것을 고려조 26대 충선왕(忠宣王)이 목(牧)은 사치(奢侈)하다 하여 부(府)로 나추워 연안부(延安府)로 개칭(改稱)하였다.

이에 차씨의 종적명(宗籍名)을 연안(延安)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31대 공민왕조(恭愍王朝)에서 고려초(高麗初)에 원나라 제도(制度)를 도입(導入)하여 귀족(貴族)에게 내리든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이란 작위(爵位)의 품계명(品階名)을 통합하여 군(君)의 제도(制度)로 개정(改定)을 하였기에 이때부터 차씨(車氏)의 득관조(得貫祖)이신 대광지백(大匡之伯) 차효전(車孝全)을 연안군(延安君)으로 칭존(稱尊)하여 오늘날 까지 연안(延安) 차씨(車氏)로 전승(傳承) 된 것 이다.

대승공(大承公)의 작은 아들 효금(孝金)은 고려태조(高麗太祖)가 성을 류씨로 명사(命賜)하니 비로서 류씨의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였으며 이로부터 형제분이 차씨와 류씨로 분성(分姓)하게 된 것이다.

차문은 신라 고려조에 수많은 문무장상(文武將相) 이 대(代)를 이어 배출된 명문이다. 고려 공민왕(恭民王) 때에 군부판서(軍簿判書) 차포온(車蒲溫) 용산군(龍山君)은 려조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때에 국방 및 외교로 뛰어난 활약을 하신 려조의 명신(名臣)이며 차문의 현조이시다. 또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려말의 성리학의 대가이시며 려조 간의대부(諫議大夫)이신 운암공(雲巖公) 차원부(車原頫)께서 조선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와 하륜(河崙)등 사얼(四孼)들의 모략으로 억울하게 추살(椎殺) 되시고 차씨 일족은 적족지화(赤族之禍)를 당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태조(李太祖)의 질책(質責)으로 태종이 잘못을 뉘우치고 공의 영혼을 위로하는 치제(致祭)를 명하고 아울러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추증하고 그 후 세종대왕(世宗大王)이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내리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가증하였다. 다행히 단종(端宗)의 명으로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외 5인의 기문(記文)과 유신석학(儒臣碩學) 44인(河緯地,朴彭年,崔恒,申叔舟,成三問,李石亨,柳誠源,姜希顔,兪鎭,姜孟卿,鄭麟趾,李禮長,李塏,權擥,李克培,李克堪,李克增,李克均,李陸,梁誠之,盧思愼,黃守身,金國光,尹弼商,魚世謙,李季甸,洪應,徐居正,權攀李怒長,尹子雲,韓確,姜希孟,具致寬,鄭昌孫,元孝然,李叔瑊,沈澮,韓繼禧,朴元亨,洪澾孫,李諴長,李叔琦,尹士勻)의 응제시(應製詩)를 모아 세조(世祖) 2년에 예조참판(禮曹參判)의 하위지(河緯地)가 서문을 지어 차운암선생(車雲巖先生) 설원기(雪寃記)를 만들어 세조에 받치니 이에 억울한 사실이 소명은 되였으나 차씨의 수난은 계속 되였다. 세조 13년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해 공을 세우고 순절하신 강열공(剛烈公) 차운혁(車云革) 임진난(壬辰亂)에 평양성(平壤城)의 로포문(露布文)으로 명나라를 놀라게 한 천하문장(天下文章) 오산공(五山公) 차천로(車天輅) 또 임진난에 창의(倡義)하여 왜적을 물리친 삼의사(三義士) 차응인(車應麟) 차덕도(車德道) 차덕홍(車德弘)등과 같은 명조현조님들이 많이계셨다.

근대에는 포우단(砲牛團)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신 차도선(車道善) 대동공보(大同共報)를 창간하여 독립운동을 하신 차석보(車錫甫)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큰 활약을 하신 차이석(車利錫) 등의 많은 독립유공자에게 정부 건국훈장이 수여 되였으며 이러한 분들이 차문을 빛내었으며 차씨 문중은 절개 굳은 혈통으로 충효공의열사(忠孝功義烈士)가 유달리 많은 문중이며 삼한의 갑족다운 긍지를 잃지 않고 자자손손이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차씨(車氏) 본관지(本貫地) 연안부(延安府)의 연혁

연안부(延安府)는 본래 고조선의 땅이다, 한무제(漢武帝)때는 낙랑군(樂郞郡)에 속하였으며 그후에 대방군(大方郡)에 속하였고 고구려에서는 동음홀(冬音忽)이라 하였으며 후에 고염성(鼓鹽城)으로 고쳤고 신라에서는 해고군(海皐郡)인데 한주도독부(漢州都督府)에 분속(分屬)하고 고려초에 염주(鹽州)로 칭하였으며 고려 성종(成宗)은 방어사(防禦使)를 두어서 패서도(浿西道)에 분속(分屬)하였고 고려 현종(顯宗)은 방어사(防禦使)를 폐하여 해주(海州)에 속(屬)하게 하였으며 후에 감무(監務)를 두어 서해도(西海道)에 분속(分屬)하였다. 고려 고종(高宗)은 거란병(契丹兵)을 막은 공(功)이 있는 곳이라 영응현(永膺縣)으로 승격(陞格)을 시키고 후에 고을 사람 차송우(車松祐)는 위사(衛社)의 공(功)이 있으므로 지복주사(知復州事)로 올리고 고려 원종(元宗)은 또 이분희(李汾禧)가 위사(衛社)의 공(功)이 있어 석주(碩州)로 고쳐 승격하고 고려 충렬왕(忠烈王)은 또 온주목(溫州牧)으로 승격을 하였고 그 후에 고려 충선왕(忠宣王)은 사치(奢侈)한 모든 목(牧)을 부(府)로 나추라 하여 연안부(延安府)로 개칭(改稱)하니 이때부터 차씨(車氏)의 관적명(貫籍名)을 연안(延安)으로 개칭(改稱)하였고 조선 태종(太宗) 4년에 풍해도(豊海道)에 분속(分屬)하였고 태종(太宗) 13년에 황해도(黃海道)에 분속(分屬)하여 도호부(都護府)를 두었다.

1895년 조선 고종(高宗) 32년 을미(乙未)에 연안군(延安郡)이 되었고, 1914년 왜정(倭政) 5년 갑인(甲寅)에 배천군(白川郡)을 합하고 평산군(平山郡)의 일부를 편입(編入)하여 연백군(延白郡)이 되었다.

이곳에 사는 주요 성씨(姓氏)로는 차(車),고(高),김(金),선(單),류(柳),유(劉),이(李)은(殷),송(宋),인(印),전(田),명(明),씨 등이있다.

차씨종문(車氏宗門)의 근원(根原) 분파(分派)의 명칭록(名稱錄)

차씨(車氏)는 고려 말기(末期)에 자손(子孫)이 번연(繁衍(하여 장손계(長孫系)인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군부판서(軍簿判書) 용산군(龍山君)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지도첨의(知都僉議) 동경유수(東京留守) 동중서좌평장사(同中書左平章事) 시호(諡號) 문목공(文穆公) 차포온(車蒲溫)의 장자(長子)인 고려조(高麗朝) 정당문학(政堂文學) 차수동(車壽童)을 파조(派祖)로 한 문학공파(文學公派), 또 문목공(文穆公)의 차자(次子)고려조(高麗朝) 전서(典書) 차명동(車命童)을 파조(派祖)로 한 전서공파(典書公派), 문목공(文穆公)의 삼자(三子)인 월파옹(月波翁) 지방어사(知防禦使) 차종로(車宗老)는 갑자기 권신(權臣)과 간신(奸臣)들의 거슬러 함을 보고 벼슬을 사직하고 둔적(遯迹)하여 처사(處士)로 삶을 마진 월파옹(月波翁)을 파조(派祖)로 한 월파공파(月波公派), 문목공(文穆公)의 사자(四子) 고려조(高麗朝) 상장군(上將軍) 차안로(車安老)를 파조(派祖)로 한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고려 고종조(高宗朝)에훈로(勳老)인위사공신(衛社功臣) 동력보좌(同力輔佐) 대장군(大將軍) 시호(諡號) 세은공(世恩公) 차송우(車松祐)의 차자(次子) 고려조(高麗朝) 중랑장(中郞將) 송림백(松林伯) 광주병마사(廣州兵馬使) 차덕규(車德珪)를 파조(派祖)로 한 지손게(枝孫系) 송림백공파(松林伯公派)와 조선조(朝鮮朝)에서 시호(諡號)를 받으신 고려조(高麗朝) 간의대부(諫議大夫)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 겸 지국평장사(知國平章事) 조선조(朝鮮朝) 증(贈)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가증(加贈) 문하시중(門下侍中)호(號)운암(雲巖) 사시(賜諡) 문절공(文節公) 차원부(車原頫)를 파조(派祖)로 한 문절공파(文節公派)와 조선 세조조(世祖朝)에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에 순절(殉節)하신 출기포의적개공신(出氣布義敵愾功臣) 증(贈) 병조참판(兵曺參判) 봉(封) 연천군(延川君) 사시(賜諡) 강렬공(剛烈公) 차운혁(車云革)을 파조(派祖)로 한 강렬공파(剛烈公派), 임진난시(壬辰亂時) 에 명나라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 )의 평양성(平壤城) 탈환(奪還)에 승전공적(勝戰功積)에 대한 찬양(贊揚)의 로포문(露布文)을 찬(撰)하여 명나라에 명성(名聲)을 뜰친 천하문장(天下文章) 오산공(五山公) 차천로(車天輅)를 파조(派祖)로 한 오산공파(五山公派)등으로 크게 팔개분파(八介分派)로 오늘날 까지 전승(傳承)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