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기도 평택시 지제(芝制)문중 소개
지제종중회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전에는 고려시대 영신현(永新縣) 조선초기는 수원부 오타면 조선후기에는 성남면 지제리와 울성리로 구분 그후 1914년 지제리(동)이 되고 구대 우무말 새터만 당현 으로 나누고 당현마을을 당재말로 부르기도 한다 당현마을은 1931년10월8일 초대회장 차동현공을 모시고 종원 31명이 문절공 지제종중회를 결성하여 기녕당현 리장님 소녕교장선생님 4대에 차범열회장이 중심으로 현재 20가구 100명의 집성촌을 이룬 마을이다 고덕면 방축리 선산 약3만평에는 26세인 숙창 묘지가 있고 27세 한국묘지 28세 호인묘지 29세 장남인득여묘지 차남은 29세 가정대부 행중추부사인 휘 득연(得連)공은 경기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작은집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그 외 자손들은 전국 각지로 나가서 후손들이 살고 있다
지제동 당현마을 형성은 약 430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용인 평택간 고속도로에서 지제교차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고 현재 신축중인 삼성평택공장
남쪽방향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에 고속지제역사가 건설되어 수서 평택간 SRT고속열차가 수서역에서 지제역까지 20분에 도착 할수 있다
2. 낙향조 소개
평택시 고덕면 봉미산 자락 남향언덕의 우뚝솟은 선산에는 낙향조 연안군 조선대부행사직 26세 휘 숙창묘지와 진사 엄윤화의 딸로 배필이된 정부인 영월엄씨를 모신 쌍분이고
한단계 아래는 차한국의 큰아들이고 통훈대부로서 행훈련원주부를 지낸 차호인묘와 생원
엄수영딸로 배필이된 숙부인 영월엄씨 및 둘째부인인 숙부인 김포정씨의 3분(三墳)이다
3. 선조들이 세운 비문을 해석 하여 본다.
가선대부홍문관대제학연안차공묘표
경기도 평택군 고덕면 방축리 봉미산 자락 남향(向午) 언덕의 우뚝 솟은 곳에 계단식으로 줄지은 묘소 중에서 가장 위에 있는 것은 가선대부로서 홍문관대제학을 지낸 연안차씨 (차)한국의 묘와 진사 엄윤화의 딸로 배필이 된 정부인 영월엄씨를 모신 쌍분이다. 한 계단 아래는 곧 公(차한국)의 큰 아들이고 통훈대부로서 행훈련원주부를 지낸 (차)호인의 묘와 생원 엄수영의 딸로 배필이 된 숙인 영월엄씨를 모신 쌍분이며, 또 그 한 계단 아래는 곧 公(차한국)의 손자이고 통정대부로서 위호□사를 지낸 (차)득여의 묘와 첫 부인인 숙부인 영월엄씨 및 둘째 부인인 숙부인 김포정씨를 한 둔덕에 모신 삼분(三墳)이다.
삼가 연안차씨를 살펴보면, 그 선대는 아주 오랜 옛날의 황제 헌원씨(중국 상고시대 3皇의 하나)로부터 나왔는데, 夏나라 때에 이르러 공갑(중국 夏나라 말의 昏君)의 아우 조명이 난리를 피하여 평양으로 와서 해가 떠오르는 산 아래에 살면서 왕씨 姓을 칭하였다. 그의 후손인 왕수긍은 기자를 섬기며 8조의 교화를 밝혔고, 신라왕조에 이르러서는 왕몽이 박혁거세를 섬기며 시중이 되어 무일이라 이름하면서 처음으로 차씨를 姓으로 삼았으니, 이후 차씨는 대성이 되어 卿․相의 큰 벼슬이 대를 이으면서 가문이 혁혁해졌다.
號가 鵝沙인 (유?)차달에 이르러서는 벼슬이 대승이었으니, 公(유차달)은 고려 태조를 도와 신라와 백제를 정벌하였다. (당시) 公(유차달)의 재산은 일국의 으뜸이었으니, 수레 1천대를 만들어 군량을 끊임없이 수송하여 삼한(후삼국)을 통합하는데 공신으로 크게 협찬하였으므로 대승 벼슬에 제수되었다. 公(유차달)의 큰 아들은 효전으로 대광백 벼슬을 제수받고 연안군에 봉해졌으니, 자손이 연안을 본관으로 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대승공(유차달)의 둘째 아들은 효금으로 기존 성씨인 유씨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좌윤 벼슬을 제수받고 문화군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문화를 본관으로 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19대에 이르러 호를 월파옹이라 하고 지방어사 벼슬을 지낸 (차)종로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은 (차)숭부로 벼슬이 참정이었고, 둘째는 (차)숭질로 밀직부사였다. 셋째는 (차)원부로 호는 운안, 시호는 문절공, 벼슬은 보문각직제학이었는데, 포은 정몽주․야은 길재 등의 여러 선생들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으니, 국운이 점차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는 평산의 운암동으로 퇴거하여 의롭지 못한 부귀를 흙이나 쓰레기처럼 여겼다.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개국하고 공훈자를 표창할 때도 불참하였으니, 그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罔僕) 절개를 온전히 하는 의지는 숭산 조견이나 야은 길재와 서로 비슷했다고 일컬어진다. 넷째는 (차)원명으로 벼슬이 도총제였으며, 다섯째는 (차)견질로 벼슬이 찬성이었는데, 그(차견질)의 아들인 (차)운혁은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강렬의 시호(剛烈公)를 받았다. 문절공(차원부)의 6세손에 (차)식이 있었으니 호는 이재로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이란 벼슬을 지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어 (차)천로는 호가 오산이고 (차)운로는 호가 창주인데,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세 부자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니 三蘇(중국 宋나라 때 문장으로 유명한 蘇洵과 두 아들 蘇軾, 蘇轍)에 견줄만하였다. 또 총제공(차원명)의 7세손에 3의사가 있으니, (차)득도․응린․덕홍의 종형제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모두 벼슬이 추증되고 숭렬서원에 배향되었다.
또 문절공(차원부)의 7세손에 (차)한국이 있었으니 이 분이 곧 홍문관대제학공이시다. 公(차한국)의 6대조는 (차)안경으로 중랑장 벼슬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셨으며, 또 성균진사인 (차)상도, (차)중생, 성균진사를 지낸 (차)윤복, 그리고 (차)희민 등의 선조가 있었으니, 이들이 곧 公(차한국)의 조부․증조․고조 및 5대조가 되신다. 아버지의 이름은 (차)숙창이니 조산대부로서 행사직의 벼슬을 지냈고 어머니는 영인 강릉유씨이신데, (두 분의) 묘는 수원 오타면의 울성에 쌍분으로 되어 있다.
公(차한국)의 배필은 정부인 엄씨로 두 아들을 낳았으니, 큰 아들 (차)호인은 주부 벼슬을 지냈고, 둘째 아들 (차)응선은 학생이었다(벼슬하지 못하셨다). 주부공(차호인)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 (차)득여가 부사 벼슬을 지냈으며, 학생공(차응선)에게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이 (차)차연이다. 부사공(차득여)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큰 아들 (차)성규는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장군으로 행충무위부사과의 벼슬을 지냈고, 둘째 아들은 이름이 (차)성거이다. 사과공(차성규)에게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이 (차)이황으로 어모장군으로 행충무위부사과를 지냈다. 公(차이황)의 배필은 숙인 곤명문씨로 세 아들을 낳았으니, 큰 아들이 진사 (차)복륜이고, 둘째 아들이 (차)형륜이며, 셋째 아들이 (차)덕륜이다. 이 밖의 나머지 현손 아래로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公(차한국)의 선대는 황제(黃帝)의 후예로서 신라 왕조에서 14세 후손이 승상을 지냈고, 고려 왕조에서는 18세 후손이 재상을 지냈으며, 지금 왕조에 이르기까지 상하 수 천년동안 도덕과 절의, 문장과 과거․벼슬 등으로 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니, 실로 우리 동방의 명망 있는 씨족이다. 公(차한국)의 선조와 자손 또한 지위가 숭상할만한 품계에까지 이르렀고, 뛰어난 행적이 있어 기록할만한 것도 많았다. 그러나 세대가 이미 멀어지고 그런 덕망을 표창하는 문장 또한 전해지고 있지 못하니, 지금 그 후손들이 비록 조상의 업적을 크게 천명하고자 하지만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러므로 단지 묘소를 드러내고자 하는 뜻에서 묘소 아래에 비석을 세우고, 후손 중에 선대 묘를 찾아 성묘하는 이들로 하여금 이곳 3위의 분묘가 몇 대 선조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할 뿐이다. 이에 후손인 (차)동현이 나에게 글을 써달라고 청하기에, 내가 비루하고 보잘 것 없는 학식이지만 삼가 그 집안의 족보와 여러 문서를 살펴 公(차한국)의 선대를 대략 기술하였다. 또 듣건대, 무려 수 백호에 달하는 公(차한국)의 후손들이 10여 세대에 걸쳐 대대로 선산 아래에 살아오면서 효행과 학문 있는 선비로서 경기와 충청 지방에 명성을 날린 인물 또한 많다고 하니, 옛말에 ‘뿌리가 깊으면 잎이 무성하고, 덕이 두터우면 얼굴에 광채가 흐른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외람되지만 이 한 마디로써 찬미하노라.